Golgulsa/골굴사에서 Golgulsa

골굴사 연혁과 사료

골굴사 2015. 8. 10. 13:24

골굴사 사료

신라 천 오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골굴사는 국내유일의 석굴사원임과 동시에 보물 제 581호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이라는 아름답고 신비한 미소를 지닌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이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고선사 서당화상비, 삼국유사 원효불기 등의 사료에 근거하여 원효성사께서 열반지인 혈사(穴寺)로 추정하는 사찰이다

 

1) 골굴사의 역사

 

경주 함월산에 위치한 골굴사(골굴암)는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함월산에 이르러 기림사와 골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함월산은 화강암 재질로 동굴 형성이 어려운 한국의 산들과 달리 석회암 재질로 이루어져 있어 천생석굴(자연석굴)이 존재했고 거기다가 인공으로 석굴 조성이 가능해서 당시 인도 출신인 광유성인 일행이 인도의 아잔타나 바자, 엘로라 석굴 같은 양식을 본 떠 만들었다고 한다. 인도의 석굴사원 양식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한국에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석굴사원으로는 골굴사 석굴이 유일하다.

골굴사의 석굴사원 조성은 불교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동굴에 불상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인도 당시의 석굴사원 양식을 그대로 적용하였으며 당시 인도 사원의 생활 방식이 그대로 전해졌다는데서 그 의의를 가진다.

 

초기 인도의 석굴은 바자같이 시대가 올라가는 예에서는 천장에 나무로 된 들보를 얹고 석굴의 정면은 아예 나무로 만들어 붙였었다.

탑이 안치된 석굴은 부처님을 참배하며 공양하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석굴은 봉헌명문에 따르면 체티야-가라(차이티야-그리하)’라고 불렸는데, ‘탑당이라는 뜻이다. 탑당과 더불어 스님들이 생활하고 수행하는 승방굴도 있었다. 승방굴 역시 지상에 지어지던 목조건물처럼 방형 평면으로 석실을 파고 안쪽의 삼면에 작은 방들을 하나씩 내는 형식이었다.

이는 골굴사의 석굴 양식과 생활 구조와 거의 동일하다. 차후 기술할 정시한 선생의 산중일기중 골굴암 기행편을 보면 법당굴, 승당굴, 설법굴, 선당굴 등이 나오고 목조 와가전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거기서 생활하는 스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현재 남아 있는 골굴사의 석굴 안 밖에서도 인도 석굴사원의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 된다. 천생굴(자연굴) 뿐 아니라 인공으로 조성 된 흔적, 인도와 마찬가지로 굴 위와 입구를 목조로 전실을 장엄한 점, 승방굴, 법당굴 등 그 안에 감실을 조성하고 불상을 모신 점, 스님들과 대중이 생활할 수 있게 방을 만들고 벽을 뚫어 내부 인테리어를 한 점, 화려한 채색을 이용하여 그린 벽화 등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인도의 석굴 양식과 석굴 내의 생활 방식 등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걸로 보아 인도의 바자나 아잔타와 같은 석굴사원의 양식을 함월산 골굴암에 그대로 조성한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만 한 점은 12처 석굴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감실을 만들고 부처님을 모신 곳이나 한 두 개의 동굴 속에 부처님을 모신 단순한 형태의 동굴법당들은 몇 개 있으나 골굴사처럼 12개의 석굴 그 자체가 가람인 곳은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12처 석굴의 유래도 인도 석굴사원의 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에서는 7~8세기부터 아잔타를 시작으로 데칸고원 서부의 곳곳에서 불교석굴 조성이 활발하게 재개 되었는데 특히 오랑가바드(7세기)와 엘로라(8세기)의 석굴들이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에는 이미 대승불교가 난숙한 형태로 발전하여 밀교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신들과 복잡한 구도의 주제가 조각으로 표현되었다. 엘로라의 남쪽에 위치한 10여 개의 불교석굴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특히 제11굴과 12굴의 내부에는 불교의 신관(神觀)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구조가 석굴의 평면과 그 안에 새겨진 불 보살상들을 통해 구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당시 인도에서는 10~12개 정도의 석굴사원 조성이 붐이었고 대승불교의 많은 부처들을 모시기 위해 그 정도 양의 석굴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인도에 머물다 신라로 넘어 온 광유성인의 눈에 비친 석회암 천생동굴 지형인 함월산 골굴사는 인도에서 발현된 부처님 세계를 신라에 구현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 유일의 12처 석굴 사원인 골굴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자연 그대로의 석회암 암산인 함월산과 이를 그대로 잘 살려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이뤄낸 석굴사원인 골굴사는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보존해 나갈 우리나라의 소중한 자연문화유산이자 불교유산임은 분명하다 하겠다.

광유성인의 창건이후 골굴사는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 [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1740년 편찬, 승려 방사파(方詞婆)편찬-. 을 보면 조선시대에 당시의 모습을 잘 살필 수 있다.

 

산 북쪽에 천생석굴이 있으니 옛적에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돌 빛이 결백하여 혹은 설산(雪山)이라 하며 혹은 단특산(檀特山)이라고도 한다. 매우 기구하고 험준하여 발붙일 곳이 없다 한다. 돌을 갈아 발 디딜 자리를 만들고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속에 돌이 편편하여 방처럼 생긴 곳이 있어 돌을 베개하고 누우면 차지도 않고 훈훈하며 병자가 거주하면 병이 낫기도 한다. 그리고 굴벽에는 조각한 석불도 있는데 어느 때의 조성인지 알 수 없으나 연기에 끄슬려서 알아 볼 수가 없다. 또 굴 위에 조각한 석불에서는 자주 서광이 빛나며 산곡과 동천석굴에 비친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이 해마다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12처 석굴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당시의 골굴사가 석굴사원으로서 병을 치유하는 종교적 측면이 강조 되어 있고, 현재의 관음굴 내부 마애불과 현재 보물 581호로 지정된 마애여래불의 상서로운 이적 등이 묘사 되어 있다. 또한 칠언으로 된 시에서도 해동, 즉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조성된 석굴사원은 골굴사 뿐임을 잘 기록하여두고 있다.

이후 골굴사는 화재 등으로 예전의 모습이 망실되었다가 지역 주민의 산중 기도처로 근근이 유지 되었던 것을 1933년 박석조 스님이 인법당을 신축하고(현재의 대적광전 자리)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하였다.

1972년에 태고종 사찰로 등록하여 198911월 까지 태고종단의 소속 사찰로 유지되어 왔다. 박석조 스님의 아들인 박굴보 스님은 골굴사에서 출생 선친으로부터 승려 교육을 받고 골굴사를 이어 받아 1984년 입적할 때 까지 골굴사를 지켰다. 박굴보 스님 입적이후 그의 장남인 박원수가 1985년에 태고종단으로부터 교임임명을 받았으나 1987년 매매, 이를 19891125일에 천년고찰이 사라질 위기를 느낀 신도들이 당시 기림사 주지였던 설적운스님(현 골굴사 주지)에 부탁하여 이를 매입, 태고종단소유의 사찰을 1990년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등록 및 등기 이전하였다.

현재 골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로 등록 되어 있다.

 

사세가 기울어 퇴락한 골굴사를 현 주지 설적운 스님이 맡아 접근이 어려웠던 길을 도로를 개설하고 법당과 요사를 증 개축하였으며, 2002년도에 인법당을 철거하고 국비를 보조 받아 대적광전을 신축하였다. 또한 현재에 이르러 선무도 총본산으로서 국내 1위의 템플스테이 사찰이 되었으며, 수많은 외국인과 내국이 관광과 체험을 위해 다녀 가고 있다.

골굴사는 신라의 화려했던 불교문화 중 국내 유일의 석굴양식의 사원이었다. 현재도 12처의 석굴 양식이 남아 있지만 여러 문헌 사료에서 보이는 12처 석굴사원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여야 한다. 현 주지인 설적운 스님은 본래의 유려하고 웅장한 석굴사원의 복원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또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골굴사를 전통사찰로 등록하여 문화재 및 석굴사원을 복원, 보존하여 후대에 아름답게 물려 줄 서원을 세우고 있다.

 

2)골굴사의 문화재적 보존가치

 

골굴사의 문화재적 보존 가치에 대하여 보물인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이하 문화재청 자료에 따라 과거 명칭인 골굴암으로 기술)

 

보물 제581호인 골굴암(骨窟庵)의 마애여래좌상은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불(磨崖佛)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 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 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축서사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995)과 조성시기가 유사하여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중엽에 제작 된 것으로 보인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유산- 문화재 정보 http://www.cha.go.kr/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은 석굴암 본존불과 더불어 신라 천년의 화려하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수작이다. 석굴암 본존불이 남성적이고도 장엄한 멋을 가진다면 골굴암 마애여래 좌상은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가 아름다운 여성적이고도 수려한 아름다움을 가진다.

화강암이 아닌 석회암 재질의 수직 바위 절벽에 양각으로 새긴 마애여래좌상은 골굴사의 주불로 모셔지며 예나 지금이나 참배객의 주 신앙 대상이고 기도처가 된다.

이처럼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골굴사의 마애여래좌상은 석굴형식의 사원 건축의 백미이다. 12처 석굴에는 법당을 만들고 불상을 모셨거나 스님과 대중이 생활하는 승방,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설법당, 참선과 명상의 공간인 선당 등이 있었는데 이런 석굴의 맨 위쪽에 주불로 마애여래불을 조성하여 모셨다. 불교 경전속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 부처님 같이 가장 높고 조망이 좋은 곳에서 한 눈에 세상을 굽어 보며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에 마애여래불을 조성한 것이다. 이는 불교관과 더불어 자연지형을 지혜롭게 활용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인 것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3)역사적 사료에 나타난 골굴사

 

. 보물 제1591호 해동지도(海東地圖)에 기록된 골굴사

 

첫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 제1591호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골굴사(골굴암)를 바위산에 조성된 목조와가로 된 전실로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첨부자료 별첨)

 

해동지도는 1750년대 초 조선 영조 때 만든 관찬 지도집으로 61282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전도, 도별도, 군현지도 뿐만 아니라 세계지도(천하도), 외국지도(중국도, 황성도, 북경궁궐도, 왜국지도, 유구지도), 관방지도( 요계관방도) 등이 망라되어 있다. 민간에서 제작된 지도집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 활용된 관찬 군현지도집이다. 8책의 팔도총도와 제4책의 서북피아양계전도는 회화식 대형 전도이며, 나머지 대부분의 지도들은 도지도, 도별 군현지도, 도내 군사적 요충지의 지도 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해동지도는 당시까지 제작된 모든 회화식 지도를 망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군현지도집 중 대표적이고, 국가차원에서 제작된 방대한 분량의 채색 필사본 회화식 지도로서 조선전도를 비롯하여 도별도, 군현지도 및 세계지도 등이 망라되어 있으며 지도에 지리지를 결합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문화재 정보 발췌

 

해동지도와 같은 관찬 지도에 골굴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석굴암과 구분하여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당시에도 골굴사가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했음을 볼 수 있다.

 

. 경주도회좌통지도(慶州都會左通地圖)에 기록된 골굴사

골굴사의 역사적 기록은 다른 지도에서도 확인된다. 경주를 비롯하여 18개 고을과 경상도의 전도가 수록된 경주도회<좌통지도>(慶州都會左通地圖)가 그것이다.(첨부자료 별첨)

 

해동지도5책에 수록된 경상도 전도 및 각 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구성된 경주도회좌통지도(慶州都會左通地圖)는 하천의 유로, 산줄기, 지명 등에서 해동지도와 다르지 않고 조세와 통계를 위한 호구 등을 시대에 맞게 기록되어 있는 지도집이다. 이 지도집에서도 골굴사의 기록은 상세히 보인다. 지도에는 현재의 방향과 위치와 일치하는 배치로 기림사와 골굴사 그리고 석굴암이 구분되어 잘 묘사 되어 있다. 또한 명칭도 석굴암과 나뉘어 정확히 골굴(骨堀)이라는 명칭이 확실히 보이고 있다. 석굴암은 목조전실이 없는 개방형 구조의 석굴로 묘사되었고 그 옆에 한 채의 요사 또는 전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석굴이라는 명칭도 보인다.

하지만 골굴사는 바위산 전체에 여러 채(8)의 목조전실이 상세히 묘사 되어 있고 그 옆에 골굴이라는 명칭 까지 정확히 달아 놓았다. 현재도 골굴사의 석굴 곳곳마다 목조 전실이 존재했었다는 흔적이 발견 되고 있다. 석굴 바로 위에는 기와를 얹기 위해 길다란 홈을 판 자국들이 각 석굴마다 남아 있고, 석굴의 바닥에는 기둥을 세운 자리와 석굴과 석굴을 연결하는 회랑을 만든 자리의 구멍들이 남아 있다. 이를 보아 해동지도와 경주도회 좌통지도의 석굴 앞 목조전실이 역사적 사실이며 골굴사의 흔적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뒤에서 설명할 정선의 골굴석굴도와 정시한의 산중일기에도 이와 같은 묘사와 기록이 나타나 역사적 사실과 당시의 기록, 현재의 흔적들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주도회 좌통지도는 경주부의 자세한 지형과 호구, 통계를 위한 지도이기 때문에 골굴사의 묘사 부분은 해동지도보다도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겸재 정선의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2 <골굴석굴도>

 

조선 후기 화가이자 종2품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던 겸재 정선 (鄭敾 16761759)의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겸재 정선이 경상도의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내면서(1733) 영남의 58곳 명승을 화폭에 담은 화첩.

2 <경주 골굴석굴도>에도 골굴사의 묘사는 상세히 나타난다.(첨부자료 별첨)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은 겸재 정선이 경상도의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내면서(1733) 영남의 58곳 명승을 화폭에 담은 화첩이다. 이 화첩에서도 골굴사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혹자는 이것이 석굴암이라고 하나 석굴암에는 해동지도와 경주도회 좌통지도 등에서도 정확히 알 수 있듯이 목조와가의 전실이 없는 개방형 구조임을 알 수 있는 바 목조전실을 갖추지 않은 석굴암이 아니라 목조전실을 갖춘 골굴암을 그린 것이라고 규장각 연구원, 남천우 전 서울대 교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문화재관련 전문가와 학자들이 정확히 이야기 하고 있다.(첨부자료- 관련 자료, 기사 별첨)

. 정시한 선생의우담선생문집산중일기에 기록 된 골굴사

 

골굴사의 역사는 사실적 기행문인 우담 정시한 선생(1625-1707)이 쓰신 산중일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산중일기는 우담 정시한 선생이 모친의 복상을 마치고 62세 되던 숙종 121686년부터 64세인 1688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여 보고 느낀대로 기록한 일기이다. 산중일기 속에는 당시의 사찰· 서원· 사우·명승 등을 사실적으로 적확(的確)하게 묘사하고 있어 오늘날 사료로서 더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안간이나 학문적 교류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산중일기는 조선시대 골굴암 여행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골굴암의 면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산중일기를 보면 골굴암 기행 하루 전인 515일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암자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기림사의 스님을 만나 골굴암을 들러 살피는 장면이 516일의 내용이다. 이 날의 기록을 보면 오늘날 골굴사와 비교해 봐도 사실적이고 정확한 묘사를 통해 기술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정시한 저 , 김성찬 역 ,국학자료원 , 1999국립중앙도서관

516일 기행문의 전문 내용 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6일 정해 세찬 바람이 불고 안개가 자욱히 끼었다가 조금 늦게 바람이 점차 줄어들고 구름이 끼었음.

아침을 든 뒤에 순선 및 큰 절의 스님이 말과 당나귀를 몰고 왔다. 출발하려고 하는데 바람이 세차고 안개가 자욱하여 노승 해명과 채안이 머물러 있다가 날씨가 좋아지면 출발하기를 청하였다. 그 말대로 출발을 하지 않고 또 석굴암에 올라갔는데, 다시 보니 더욱 기이하였다. 조금 늦게 걸어서 내려왔는데, 험준하고 가파랐다. 5리쯤 가서 말을 타고 산등성이를 지나 가운데 있는 마을을 통과하였는데, 마을의 이름이 범곡촌이었다. 암석 위에 있는 곳이라 자못 조용하고 깊숙하였다.

길에서 지림사의 스님 준환을 만났다. 15여 리를 가서 골굴암에 이르러 앞의 언덕에 올라 석봉들을 바라보니 기괴한 돌의 모습들이 가득 하였다. 층층이 굴이 있고 굴 앞에는 처마와 창, 벽 등을 꾸며 만들어 채색도 하였는데, 보름날에 채색을 마친 대 여섯 가지가 완연히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바위 사이에 걸려 있었다. 곧 법당굴(法堂窟)에 들어가 앉았는데 스님 법릉이 있다가 자리를 베풀어 맞아주었다. 조금 앉아 있다가 법릉에게 밥을 지어달라고 하고 곧 수민 및 늙은 병자 김운길과 함께 사자굴(獅子窟)로 올라갔는데 비어 있었다.

설법굴(說法窟), 정청굴(正聽窟)의 터에 들렀고, 승당굴(僧堂窟)은 비어 있었다. 달마굴(達磨窟)에 이르니 곧 수민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또 선당굴(禪堂窟)로 올라갔는데, 굴에 스님 쌍성 및 김운길의 아들 승선과 청선은 모두 나갔고 방이 매우 정결하였다. 경신과 앉아서 살피고 있는데 능선이 식사를 마련해 주었다. 다 들고 나서 곧 출발하여 동산치를 넘었는데, 그 고개는 길이 험하고 매우 길어 안팎이 거의 20여 리나 되었다. 저녁에 불국사로 돌아와 불존방에 들어오니 속리산의 성희, 의섬이 이미 도착해 있어 매우 반갑게 만나 이야기하고 한참 있다가 돌아갔다. 준환이 와서 만나고, 노승 성오와 성준이 와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경루의 별실에서 잤다.

- <산중일기> 하권 516일 분 -

위의 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불국사와 석굴암을 여행하고 다음날 골굴암을 여행하게 되는데 지금의 골굴사 오륜탑에서 바라 본 석굴 전체의 조망과 각 석굴을 돌아보며 쓴 내용이 나온다. 맞은편에서 본 골굴암의 전경은 기괴한 암들이 즐비했고 층층마다 석굴이 있고 그 석굴들 앞에는 처마와 창, 벽이 있고 형형색색 채색을 하였는데 그 모습이 그림과 같이 아름답다고 표현 되어 있다. 이를 불교예술로 보면 석굴마다 목조와가 전실로 꾸며졌고 화려한 단청이 채색되어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수묵채색화를 보는 듯 했다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석굴마다 각자 이름이 있었고 그 석굴에는 법당과 요사(승려들이 거주하는 곳) 등 각 석굴마다 저마다 역할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 석굴에는 승려들과 대중이 거주하며 의식주를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산중일기를 더 살펴보면 골굴암이 불국사와 석굴암과 함께 당시에 잘 알려진 순례관광(巡禮觀光) 코스였음을 부가적으로 알 수 있다.

 

.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 [ 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 1740년 편찬. 승려 방사파(方詞婆)가 편찬-에 기록된 골굴사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 [ 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의 골굴사 부분을 발췌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천생석굴(天生石窟)

 

산 북쪽에 천생석굴이 있으니 옛적에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돌 빛이 결백하여 혹은 설산(雪山)이라 하며 혹은 단특산(檀特山)이라고도 한다. 매우 기구하고 험준하여 발붙일 곳이 없다 한다. 돌을 갈아 발 디딜 자리를 만들고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속에 돌이 편편하여 방처럼 생긴 곳이 있어 돌을 베개하고 누우면 차지도 않고 훈훈하며 병자가 거주하면 병이 낫기도 한다. 그리고 굴벽에는 조각한 석불도 있는데 어느 때의 조성인지 알 수 없으나 연기에 끄슬려서 알아 볼 수가 없다. 또 굴 위에 조각한 석불에서는 자주 서광이 빛나며 산곡과 동천석굴에 비친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이 해마다 있는 것이다(사적기 별첨).

 

골굴(骨窟)

 

區分十二天生窟 (구분십이천생굴)

하늘이 만들어낸 열 두 개의 천생 굴은

 

逈絶塵緣恒淨潔 (형절진연항정결)

속세(塵緣)와 멀리 떨어져 항상 정결하도다

 

縹緲危巒戴月高 (표묘위만대월고)

아득한 산봉우리 위 높디 높이 둥근달 떠 있고

 

崎嶇曲路彫崖出 (기구곡로조애출)

굽이굽이 험한 길에는 벼랑 위 천연바위 우뚝하네

 

岩房不熱石暹懊 (암방불열석섬욱)

바위 속 돌방은 불을 지피지 않아도 훈훈하고 따뜻하도다

 

檀木無煙焄自鬱 (단목무연훈자울)

박달나무 연기는 없지만 그을음은 자욱하네

 

休道天西驄嶺外 (휴도천서총령외)

총령 너머 서천 천축을 말하지 말라

 

海東亦有眞闍堀 (해동역유진사굴)

해동에도 진짜 기사굴산이 예 있지 않은가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 중 골굴사 부분 -

 

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골굴사는 1740년 당시의 사적기 기록에서도 12개의 천생굴로 이루어져 있고, 현재의 관음굴 안에 마모된 마애불이 있었다는 점, 현재의 보물인 마애여래불의 서광과 이적에 대한 부분, 석굴이 당시 사람들에게 치유의 공간이자 신비의 공간이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의 골굴사가 해동 유일의 석굴사원이었다는 점 등이 자세히 기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 [ 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 정시한 선생의우담선생문집산중일기, 겸재 정선의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2 <골굴석굴도>, 경주도회좌통지도(慶州都會左通地圖), 보물 제1591호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에 기록된 골굴사는 공통적으로 당대 유일의 석굴사원으로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